넷플릭스에서 개봉해 은근히 인기를 끌고 있는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이 영화는 과거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안데스의 기적이라 불리기도 하는 사건을 기반으로 ‘눈의 사회’라는 논픽션 작품이 나왔고, 그것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안데스 설원 생존자들의 영화다. 이 사건은 이미 ‘얼라이브 Alive’라는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었다.사건의 시작은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의 아마추어 럭비팀 선수와 관계자들이 우루과이 공군 571편의 항공기를 타고 칠레 산티아고로 향하면서부터였다. 부유한 대학생 럭비팀이었기 때문에 공군 수송기를 전세내 이동할 수 있었다. 당초 계획은 칠레 산티아고로 3시간이 조금 넘는 비행을 하고 직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중에 기상이 나빠서 아르헨티나 멘도사에 중간 기착을 하게 되었다.럭비 팀의 원래 비행 계획멘도사에 머물며 상황을 살폈지만 날씨는 따뜻해질 기미가 없었다. 이때 비극의 시작인 점이 이들이 이용한 것이 공군 수송기였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외국 군용기가 자국 영토에 24시간 이상 머무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민항기라면 기상악화로 좀 더 머물 수 있었지만 군용기여서 어디든 옮겨야 했다.기상 악화로 변경된 비행 경로따라서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륙해야 했다. 이들은 다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면 사고가 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겠지만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들이 아르헨티나 멘도사 공항을 이륙한 것이 1972년 10월 13일 오후 2시경이었다. 구름이 짙게 깔려 좋지 않은 기상 상태로 강행군을 하기도 하고, 높은 안데스 산맥을 우회해 가다가 판단을 그르치기도 했다. 강한 바람으로 실제로는 산맥 가운데에 있었는데 어느 정도 벗어난 지점이어서 착오를 한 것이다. 그 결과 비행기는 결국 안데스 산맥의 한 봉우리에 충돌했다.직선거리로는 가깝지만 산줄기가 높아서 똑바로 갈 수가 없었다날개는 떨어졌지만 그래도 몸통은 크게 부서지지 않고 그대로 산등성이에 떨어져 미끄러졌다. 추락 후 생존자는 33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교신이 두절됨으로써 추락 사고가 있었다고 판단하고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가 수색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안데스 산맥의 위쪽은 혹독한 기후이기도 하여 기상이 좋지 않았다. 심지어 기체가 흰색이어서 눈이 가득한 곳에서 찾기가 어렵기도 했다. 결국 2주 정도 뒤 생존자를 찾지 못하고 수색을 종료했다. 혹독한 고산 기후에서 2주 이상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한편 초기 생존자 중 일부는 이미 부상이 심해 다음날 바로 사망했다. 그래서 추락 후 하루가 지난 시점에 생존자는 28명이었고, 8일 뒤 또 한 명이 사망해 27명이 됐다. 처음에 이들은 기내 음식과 함께 눈을 녹이고 물을 마시며 버텼다.1212 군사반란 사태 사망자인 김오란 소령, 정성엽 병장, 영화 서울의 봄의 실존 인물, 실화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한 달 만에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20대… blog.naver.com이들은 라디오로 수색 소식을 듣다가 2주가 지난 뒤 수색이 종료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이때쯤이면 식량도 다 떨어져 눈 속에 묻은 사람들의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이후 눈사태로 또 사망자가 발생하여 10월 29일에는 19명이 생존하였다. 이들은 구조 요청을 위해 산맥을 벗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구체적인 내용은 영화에서 묘사되고 있지만 실화와 거의 비슷하게 재현됐다고 한다.넷플릭스 영화 ‘리브 더 월드’의 비하인드 리뷰, 결말 정보 등 ‘리브 더 월드 비하인드(Leave the World Behind)’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현재 세계적… blog.naver.com결국 12월 20일 구조를 위해 출발한 두 사람이 오랫동안 걸어 산맥 가장자리에 도착했고, 마침 농부를 만나 구조를 요청했다. 비행기 추락 사고가 발생한 지 72일째 되는 날 구조 요청이 성공한 것이다. 12월 22일 헬기가 발사돼 생존자를 구조했지만 최종 생존자는 16명이었다. 어려운 안데스 산맥 상황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기적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구조 직후에는 이들에게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생존의 상황이었다는 점에 호응하는 이들이 더 많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비난은 수그러들었다. 생존자 중 일부는 아직 많은 나이에도 살고 있으며 다양한 경로로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